흔적
2016-05-31
편지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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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타임:고속버스 전문 매거진-흔적 

워낙 게으른 주부인지라 며칠 전에야 겨울옷, 긴팔 옷과 살림살이를 정리하고 여름을 맞이할 준비를 했습니다. 아직 여름이 오려면 한참 멀었지 하며 늑장을 피우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날이 더워지면서 반팔 옷들이 필요했기 때문이죠. 옷정리와 더불어 책장의 읽지 않는 책, 뒤죽박죽 엉망인 수납장을 정리하고 먼지가 소복이 쌓인 집안 구석구석을 쓸고 닦았습니다. 그러던 중, 몇 가지 오래된 흔적을 발견합니다. 올해 열한 살 된 딸아이가 어릴 적 붙여놓았던 뽀로로와 공주 스티커들, ‘이지원 천사’ ‘언니 미워등 겨우 그 뜻을 알아볼 수 있게 빛바랜 싸인펜 낙서들, 크고 작은 모양으로 꾸깃꾸깃 접힌 쪽지들까지. 아이는 다 애기 때 했던 것들이라며 이제 다 커서 낙서 따위 하지 않는다고 강력히 주장했지만 몇 년이 지나도 어딘가에서 하나둘씩 흔적들이 나오는 걸 보면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랄까요?

 

스티커를 떼고 남은 자국, 흐릿하게 남은 글씨들, 누렇게 색이 바랜 종이쪽지들이런 아이의 흔적을 발견하는 게 전 싫지 않습니다. 반짝반짝 윤이 나며 매끈하고 깔끔한 것도 좋지만 적당히 투박하고 낡고 거칠거칠한 세월의 흔적이 남은 것들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왠지 행복해집니다. 여행 중 만나는 많은 풍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삐까번쩍 으리으리한 새 건물 속에선 왠지 불편합니다. 미끄러지게 광택나는 바닥을 걷는 것은 어째 더 불안합니다. 100년이 넘었다는 고택의 기둥에 박힌 손자국을 보며 나무의 숨결을 느낄 수 있고, 오랜 세월 같은 자리에 서서 모진 비바람을 이겨내느라 금이 가고 녹이 슨 담장과 철제문을 보면 왠지 뿌듯하기도 합니다. 여행 중 만나는 모든 풍경, 물건, 사람들에게 좋은 흔적을 남기는 여행자가 되고 싶다는 바람입니다. 시간이 흘러 그 흔적을 발견했을 때 눈살 찌뿌려지지 않게, 살짝 입꼬리 올리며 미소지을 수 있는 아름다운 흔적을 남겨야겠다 생각합니다.

 

연필로 시를 쓴다

앞날 흐릿해 힘주어 눌러쓰면 뒷장에 배기는 흔적들,

어쩌면 나는 흔적을 따라 살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박후기 시인의 시 흔적들의 일부입니다.

당신은 누구의 흔적을 따라 살고 있나요? 어떠한 삶의 흔적을 남기고 있나요?

 

 

기자/에디터 김홍미 사진 R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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